[청라온=이원탁 기자] 대학가의 시국 선언이 높게 솟아오른 날을 기억한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풍경이나 여전히 생생하다. 대학 건물 안 복도와 게시판에 시국과 관련된 대자보가 빼곡하게 붙어 있고, 대학원 건물 앞에서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던 그 시기.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다운 행위였다.
특정 가치관을 옹호하고자 하는 표현이 아닌, 지극히 객관적인 논지를 펼치기 위한 회상이다. 개인의 정치관이나 사상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준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골자 아니던가. 한국을 포함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소극적인 방식으로서의 투표와 적극적인 행동으로서의 시위를 존중하고 인정한다. 시민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권리로서 말이다.
대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을 포함한 청소년 역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그들 또한 한국의 국민이 아니던가. 어리다 한들 충분히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이다. 그것에 맞게, 고등학생도 주어진 권리를 충실히 이행했다. 집회에 참석하여 목소리를 드높이고, SNS를 활용하여 시국 선언 상황을 게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곱게 보지 않았다. 서울 은평구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SNS에 올린 시국 선언을 내리도록 요구하지 않았던가. 정치와 관련된 행동을 한다면 최대 퇴학 조치에 처한다는 학칙에 근거하여서 말이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그 기저에는 청소년은 아직 정치에 참여하기에는 ‘미숙하다’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정치에서 눈을 돌리면, 유사한 궤의 사건은 현재까지 상당수 발생했으며, 발생 중이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게임 셧다운제가 바로 그 예시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청소년 유해매체 규제 및 신고, 차단 제도 또한 이와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 있으리라. 자녀 보호를 명목으로 개발된 스마트폰 보호 앱 역시 대표적인 사례로 자리 잡아 버렸다. 굳이 교복 논란을 가져오지 않아도 충분히 사례가 많다. 위 사례들은 단지 분야만 다를 뿐이다. 정치와 문화라는 분류에 갇혔을 뿐, 청소년은 아직 ‘미숙하다’라는 인식에서 기인한 제도들이다.
청소년들이 미숙한 건 사실이다. 학교와 부모의 요람 안에서 사회의 일부분만을 맛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규제가 청소년의 안전이 아닌, 청소년의 규제를 목적으로 악용되지 않던가. 더불어 사리 분별이 되는 영역까지 제도와 인식이 침범하게 된다면, 청소년들의 공간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제도는 아무런 흔적 없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제도를 입안하고, 검토하여, 통과시키는 과정에서는 법률 기관과 전문가 집단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쪽은 언제나 여론이다. 그리 본다면, 청소년을 둘러싼 제도와 체계는 결국 인식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순진무구한 아동의 시기를 거친, 그리고 머지않아 사회로 나아갈 과도기의 대상으로서. 청소년은 그러한 인식 속에 비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해’해야만 한다. 이전보다는 많이 완화되었으나, 청소년의 ‘무해함’을 지키려는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조그마한 언행 하나마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면 즉각적으로 배제당한다. 약간이라도 오물이 묻을 가능성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하려 든다. 그 제대로 된 인과 관계와 숨겨져 있던 이점은 무시한 채로. 사회는 청소년을 ‘순수하고도 무결한 존재’로 규정하며, 그들에게 드리우는 구름을 두려워한다. 그 구름이 먹구름인지 뭉게구름인지는 확인하지 않는다.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이자, 곧 국가의 미래다. 그런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사회는 당연히 좋은 사회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무해한 사회가 좋은 사회는 아닐 것이다.
/이원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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