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언론 '청라온' Blog 사설/칼럼 청소년의 우경화인가, 기성세대의 낙인인가
사설/칼럼

청소년의 우경화인가, 기성세대의 낙인인가

청라온과 새벽의 은빛 같이 있는 로고 (제작=안창민 단장)

청라온과 새벽의 은빛 같이 있는 로고 (제작=안창민 단장)

[청라온=안창민 단장, 새벽의 은빛=조성만 의장] 요즘 뉴스들을 보면 청소년의 우경화를 ‘극우화되고 있다’며 이를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기사와 보도가 지나치게 많다. 일부에서는 ‘노알라’, ‘드럼통’과 같은 혐오 표현이나 인터넷 밈이 재미있어서 우파 성향을 갖게 된다는 식의 가벼운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은 청소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그 판단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청소년은 다양한 정보 환경 속에서 정치와 사회 문제를 접하며 스스로 판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선은 청소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그 판단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문제가 단순한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청소년의 사회참여가 확대되면서 기성세대의 인식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청소년의 정치적 선택은 ‘스스로 내린 판단’이 아닌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먼저 해석되는가. 어떤 기준으로, 누가 그 경계를 긋는가. 본 칼럼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청소년을 합리적 판단의 주체가 아닌, 쉽게 흔들리는 존재로 전제하는 시선이 과연 타당한지를 따져보고자 한다. 청소년 역시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이며,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적 선택을 단순한 유행이나 감정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청소년 사회 전체를 독립적인 시민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로 규정하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이자 단편적인 시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본 칼럼에서는 건강한 사회참여 정신을 가진 한 명의 청소년으로서, 나는 이러한 단편적인 시선에 대해 분명히 반박하고자 한다.

일부 기성세대는 청소년의 우경화 현상을 ‘극우화’로 왜곡한다. 물론 청소년 사회에서 극단적인 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못하나, 일부 기성세대들은 그 극히 일부를 청소년 사회의 전부, 혹은 주류로 보고 청소년의 우경화를 극우화로 매도한다. 내 주변 청소년 10여 명에게 혐오 발언에 대한 인식을 직접 물어본 결과,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대다수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보수 성향을 가진 서울시에 거주하는 17세 고등학생인 “그런 발언이 보수 전체의 이미지를 망친다”고 말했다. 이처럼 혐오 발언을 일삼는 청소년들은 결코 청소년 사회의 주류가 아니며, 청소년들은 이를 멋진 모습으로 여기지 않는다.

청소년의 우경화 자체는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미래 세대로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주체다. 단순한 이미지나 분위기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기준을 가지고 정치와 정책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각 정당 출신 공직자들의 정책 성과와 국가 운영 방식, 안보관과 발언,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이는 결코 가벼운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판단 방식이다. 실제로 보수를 지지하는 청소년에게 지지 이유를 물었을 때 “보수가 지키는 전통 가치가 좋다”, “보수권의 정책과 정치인들이 청소년의 권리를 주장해줘서”라는 말을 여러 친구들에게 들었다.

청소년의 우경화는 기성세대의 청소년 사회 불신에 따른 권리 제한 시도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청소년은 정치적 의사표현의 주체가 아닌 보호와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져 왔다. 선거권은 2020년에야 만 18세로 하향되었고, 그마저도 여전히 많은 청소년은 정치적 발언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청소년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기성세대가 기대하는 방향과 다를 때 곧바로 “위험하다”거나 “선동당했다”는 식의 반응이 돌아온다는 점이다. 진보적 성향의 청소년에게는 “민주시민의 각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는 순간 “극우화”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 이중적 잣대야말로 청소년 정치 참여를 둘러싼 논의의 가장 큰 결함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시민이 공존할 때 가능하다. 청소년도 예외가 아니다. 청소년이 보수적 가치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퇴행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듯, 진보적 가치를 지지한다고 해서 무조건 올바른 성장의 증거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을 선택했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있었느냐이다.

특히 입시와 수행평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공정성’, ‘기회’, ‘결과에 대한 책임’과 같은 문제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학생부 기재 방식의 불투명함, 특기자 전형을 둘러싼 형평성 논란은 청소년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불공정의 실례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노력한 만큼 결과가 돌아와야 한다”는 능력주의적 감각을 강화시키고, 결과보다 과정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담론보다 규칙과 절차의 엄격한 적용을 중시하는 보수적 시각에 더 강한 공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은 현실에서 출발한 논리적 귀결이다. 또한 이를 ‘극우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청소년이 처한 현실과 이로부터 도출된 정체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의 정치적 선택을 ‘왜 그런가’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지, ‘잘못되었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을 극우로 낙인찍는 순간, 우리는 한 세대의 목소리를 배제하게 되고 공론장의 건강한 토론 구조 또한 약화된다. 청소년은 더 이상 보호의 대상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생각하고 판단하며,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정과 낙인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논쟁할 수 있는 성숙한 환경이면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극우화’라는 단어로 축소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지금 이 칼럼을 쓰는 것도, 단순히 반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청소년 역시 공론장의 한 주체임을 직접 증명하기 위해서다. 기성세대가 청소년의 정치적 선택을 온전히 인정하는 날, 그것이 비로소 건강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안창민 단장, 조성만 의장

*이 칼럼은 청라온과 새벽의 은빛이 MOU 체결의 일환으로 함께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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